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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31

근거 없는 믿음

택시 운전사. 글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요.

오늘 택시를 타고 용인에 갈 일이 있었다. 가는 길과 오는 길에 택시를 타면서, 그리고 용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왜 현 정부가 그렇게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아주 인상좋은 택시 기사님께서 그러셨다. 내가 엘지전자 다닌다고 하니까, 왜 정부가 기업이 열심히 일하도록 해줘야하는데 잘 나가는 대기업들에게 시비를 걸어 정권마다 하나씩 죽이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죽이는 이유가 정치 자금을 주지 않으니까 괘씸해서 죽이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런 류의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이야기는 오늘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듣게 되었다. 대우가 망한 이유가 김우중 회장이 너무 나대니까 전직 대통령의 눈밖에 나서 해외의 자금줄을 정부가 다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우가 망한 것이고, 김우중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고 너무도 당당하게 이야기하였다. 또 국가적으로 밀어줘도 시원찮을 잘 나가는 황우석에게 민주노동당이 앞장서서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밉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 나라에는 군사 독재 시절 언론의 자유가 전혀 없을 때에 언론은 정권이 선전하는 말만 받아적어왔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공식화되어 유포된 담론과 그 이면에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실이라고 믿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광주에서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공식 발표와 광주 사람들이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5.18 당시, 시민을 지켜야 하는 군대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던 광주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공식적으로 회자되는 이야기 이면에는 분명히 무언가 보이지 않는 음모와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믿도록 훈련받아왔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의 정부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국민이 직접 선택한 정부이다. 그리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점점 더 사회는 투명해지고, 부분적으로 민주화되어간다. 과거에 정부의 눈치를 보며 정치 헌금을 갖다 바쳤던 재벌 기업들도 이제는 투명해져가는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하고 구린내나는 방법으로 비즈니스를 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기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런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과거의 구습을 고집하다가 대우, 현대 자동차, 그리고 황우석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누가 더 큰 권력을 쥐고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대우, 현대, 황우석이었지 결코 검찰, 대통령이 아니었다. 과거에 화려한 경력을 가졌거나 아직도 화려해보이는 한국 사회의 권력과 우상들에 감추어진 비리와 부정, 허구가 이제 무너지면서 우리 사회는 투명하고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재 정권의 음모와 조작에 의한 것이라는 황당무개한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현재 집권당이 국민들에게 그렇게도 인기가 없는 이유가 고작 이런 잘못된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는가? 물론 집권당은 국민들이 탄핵 정국 이후에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줬지만 개혁 열망을 저버리고 국가 보안법 폐지도 흐지부지하고, 사학법도 한나라당과 야합하려 들고, 부동산 투기도 잡지 못했고, 비정규직 문제도 더 악화시켰고, 미국과의 자유무역지역(FTA) 협정에서도 죽을 써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람들이 한나라당에 열광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고 굳건히 믿었던 우상들이 무너지면서 그 우상을 무너뜨린 주범 내지 배후 조종자가 현 정부이기 때문에 현 정부는 공공의 적이라는 것이다.

내일이면 지방 자치단체장을 뽑는 선거날이다. 나는 어차피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을 찍을 일은 없지만, 끊이지 않는 부정 부패, 살육과 고문, 군부 쿠데타, 국민 탄압의 과거 경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데다 진정으로 반성하고 회개하지 않은 한나라당이 국민들에게 대안으로 선택되는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런 선택의 배후에 근거없는 "유비" 통신에 의한 추측과 본능적인 거부감이 자리잡고 있다면...

2006-05-30

악성 게시물에 당하다.

홈페이지 첫 페이지(http://gregshin.pe.kr)에 누군가 악성 게시물을 올려놓아서 홈페이지가 비아그라 비슷한 성인 약 광고로 자동 전환된 채로 얼마간 방치되었다. 이런... 처음엔 메타 리디렉션을 썼나 하고 브라우저의 메타 리디렉션 기능을 꺼도 계속 페이지가 약 광고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혹시 index 페이지를 해킹했나 하고, 인덱스 소스를 살펴봤는데 아무런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문제는 게시물에 html 마크업 사용을 그냥 허용해놓은 것이었는데 이것을 악용해서 embed 요소를 이용해 광고 페이지를 불러오고 있었다. 아주 옛날 글에 대해 답글 형식으로 올린 것으로 봐서, 기계가 올린 것은 아닌 듯 하고 사람이 올린 것 같다. 최근에 올라온 글이 항상 첫 페이지에 뜬다는 점과 html이 허용된다는 점, 아무나 글을 올릴 수 있게 게시판을 개방했다는 점을 악용해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이런 XX같으니라고...

블로그로 옮기고 나서 게시판에 글 쓸 일이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막아놓지 않았는데, 일단 html 사용을 부분적으로 막았다. 그래도 악성 광고가 올라오면 아예 html 사용을 전면적으로 막아버리고, 그래도 대책이 안 서면, 로그인 사용자만 쓸 수 있게 막아버려야겠다. 흑흑... 비록 손님은 적어도 최대한 열어놓고 아무나 들어와서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기본 운영 방침이었는데... 슬프게도 이런 일이 왜 자꾸 생기는 것일까?

호로비츠를 위하여

호로비츠를 위하여 영화 포스터: 엄정화가 연필을 쥐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장면이 진짜 피아노 선생님 같다.

퇴근 후 혼자 오산 시네웰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다. 다빈치 코드나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영화도 있었지만 피아노 영화라는 "호로비츠를 위하여"를 보고 싶었다. 평일이고 별로 흥행하지 못한 영화인데다 작은 도시의 극장이어서인지 영화관엔 채 10명도 안 되는 관객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주 한적하고 여유있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었다. 변두리 피아노 학원 선생님인 지수는 유학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부모를 잃고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경민이가 나타난다. 지수는 경민이 음악에 대해 숨은 재능을 가진 소년임을 알고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줄 구세주가 나타난 것으로 기대하고 그를 가르친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귀에 익은 많은 곡들이 나온다. 한 때에는 음악도를 꿈꾸며 피아노를 배우면서 기쁘고, 힘들고, 좌절하고, 지겹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영화 장면과 겹쳐서 지나갔다.

산수국민학교 뒤쪽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수도 피아노'와 '삼익 피아노', '영창 피아노' 소리가 참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수도 피아노의 웬지 서민적인 소리와 삼익 피아노의 조금은 절제된 저음부 위주의 소리보다 고음이 맑은 영창 피아노 소리를 개인적으로 좋아했었다. 그리고 왜 그 당시 피아노 선생님은 "도레미파"를 "도레미화"라고 발음했는지 궁금했었다. 예외없이 바이엘, 체르니로 이어지는 따분한 피아노 레슨보다는 광고 음악이나 만화 음악, 그리고 TV와 라디오를 통해 나오는 온갖 종류의 음악을 흉내내고 변형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에 또래의 남자 아이들보다 오랬동안 피아노를 배웠던 것 같다.

음악을 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다 지수와 같은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누구는 유학 갔다 와서 콩쿠르 심사 위원이 되고, 누구는 콩쿠르 나가는 아이의 동네 피아노 선생님이 된다. 그러나 부모를 잃고 세상과 벽을 쌓은 경민의 컴플렉스와 상처는 콩쿠르에 나가서 멋지게 자신의 인생을 빛내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피아노 선생님 지수의 기대를 보기좋게 무너뜨린다. 그리고 찾아오는 할머니의 죽음으로 경민은 갈 곳이 없어지고, 그런 경민을 지수가 키우면서 처음에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었지만, 음악과 피아노를 매개로 둘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어쩌면 뻔한 결말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몇 번씩이나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언제나 큰 소리로 웃으면서 자신의 수줍음을 드러내는 피자 가게 아저씨도 참 매력적이고, 철없는 피아노 선생님 엄정화도 매력적이다. 영화에서도 나왔고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음악에서 재능과 환경과 운이 따라 성공한 소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부러움은 참 크다. 그리고 다른 분야와 달리 그런 부러움은 성공한 현 상태에 대한 부러움이라기보다 성공하지 못한 요인이 자신의 재능 부족일 것이라는 내적 귀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대미를 장식하고, 음악 자체가 주는 힘과 영화의 스토리가 축적해놓은 벅찬 느낌이 한꺼번에 밀려와 넋을 잃을 정도였다. 오랜만에 본 가슴 따뜻한 영화, 주위에 권하고 싶다.

2006-05-17

고소당한 target.com

UC Berkeley의 한 시각 장애인 대학생이 미국의 온라인 쇼핑 사이트인 target.com을 운영하는 Target Corp.를 장애를 가진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미국 장애인법 위반 혐의로 지난 2월 고소했다 (San Francisco Chronicle에 실린 기사, 미국 장애인 권리 옹호연합회에 실린 기사). 시각 장애인이고 UC Berkely 대학교 3학년인 Bruce Sexton Jr.는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회사들이 미국내에 130만명에 이르는 시각 장애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직접 사이트를 방문해보니 우선 각 이미지에 대체 텍스트(alt text)를 주요 메뉴에만 넣고, 나머지는 넣지 않았다. 이것이 고소를 당하게 된 주된 이유였다. 이미지를 끄고 사이트를 탐색해보려고 하니 도통 대체 텍스트가 없어서 사이트 탐색이 불가능하였다. 이것이 시각 장애인들이 사이트를 보는 방법이다. 미국은 재활법 508조가 있어서 공공기관 홈페이지의 접근성은 우리 나라와 비교가 안 될만큼 잘 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의 상업적인 사이트들의 접근성도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미 IBM, Apple, HP, Microsoft와 같은 IT 업체들은 자신들의 제품에 장애인의 동등한 접근성을 구현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쇼핑몰 사이트들은 생활에서 활용 빈도가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접근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확인해보니 eBay는 그나마 Target.com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고, Amazon은 별도의 장애인 및 모바일 사용자용 페이지를 만들어놓았다. 우리 나라 쇼핑몰들은 어떨까? 요즘 잘 나간다는 Gmarket, 그리고 Interpark를 들어가보았다. 예상했던대로 최악이었다. 우리 나라 쇼핑몰들의 특징은 이미지에 대체 텍스트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도한 깜박거림과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남용, 그리고 Windows의 Internet Explorer가 아니면 아예 쇼핑이고 뭐고 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에 김기창 교수가 정보통신부에 웹 페이지 국제 표준화를 위한 민원을 제기하였고, 현재 네티즌들의 이름으로 웹 표준을 지키지 않고 특정한 제품에 종속적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소비자의 선택권을 빼앗고, 정당한 접근 권한을 침해하였으며, WTO 등 국제 규약을 지키지 않은 이유로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준비중이다. 웹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정보의 원천이고 생활의 도구이다. 다행히 웹은 사용자 특성과 기계의 특성이 아무리 달라도 다 수용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한국의 웹과 미국의 웹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고소당한 Target.com 사이트 | 이미지를 끄고 본 eBay Amazon의 장애인용 페이지 이미지를 끄고 본 G Market 이미지를 끄고 본 Interpark

2006-05-16

이사

근 8년동안 살았던 방배동 집을 떠나서 지난 5월 5일 오산으로 이사왔다. 방배동 집보다 훨씬 작은 원룸이어서 짐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붙박이장이 큰 역할을 해서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이사 오게 되면 여러 가지 변동 사항이 생겨서 신경쓸 일이 꽤 있다. 우선 동사무소에 가서 전입 신고를 하고, 기존의 전기, 수도, 가스 요금을 정리/정산하고, 그리고 전화와 인터넷을 해지 신청하고, 여러 곳에 등록된 집주소도 바꿔야 한다. 새로운 집에서는 주변에 있는 쇼핑할 만한 곳, 밥 먹을만한 곳, 세탁소, 미용실, 편의점, 꽃집, 서점, 은행, 버스 노선, 주변 상가 등을 눈에 익혀두어야 한다. 그리고 새 집에 인터넷도 설치했고, 화분도 사두었고, 커튼도 달았다. 유선 전화와 Cable TV를 설치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설치하지 않기로 했다. 휴대폰은 음질이 나쁘고, 요금도 비싸고, 장시간 통화하면 뜨거워지는 것 때문에 유선 전화를 설치할까도 생각했었는데 그냥 휴대폰용 핸즈 프리 이어 마이크를 사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조금 있으면 구닥다리 컴퓨터도 처분하고 아이맥이나 맥북프로를 사야겠다.

회사가 가까워지고 신변이 정리되니 마음이 편해진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서울 시장 선거에 참여할 수 없고, 경기 도지사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2006-04-24

결혼을 축하드려요~

드디어 저희 형(KLDP 프로파일, 모질라 포럼 프로파일: low profile을 유지하려는 저의 형 때문에...)이 2006년 4월 23일 결혼을 했습니다. 저도 사촌 형수님이 아닌 친형의 형수님이 생겼구요^^. 형수님과 아직 이야기는 많이 못해봤지만 정말로 멋진 분이시고, 두 분은 참 잘 어울리는 커플입니다. 광주와 대구에서 자라난 두 사람이 새로운 터전 대전에서 사랑을 키워가게 됩니다. 두 사람이 처음처럼 끝까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여 평등하고, 평화로운,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신정식-조민희 결혼 사진

내면에 눌려있는 평화를 일깨우는 책: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책표지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 박노자와 같은 분이 한국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놀랍도록 감수성이 뛰어난 한 한국인이 우리가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일상화되어 느끼지 못했던 우리의 자화상을 너무나도 잘 지면화했기 때문이다. 그런 박노자 교수의 또 하나의 저작,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라는 책의 부제는 박노자의 북유럽 탐험이다. 우리가 막연하게 이상적인 복지 사회로 부러워 마지않는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을 박노자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가 궁금했다. 그리고 책의 첫머리에서 보여지는 노르웨이의 사회는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 사이의 체계도, 위아래도, 질서도, 권위도 없는 곳이었다. 다만 사람이기 때문에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지, 어떤 사람이 교수라고 해서, 또는 버스 기사라고 해서, 다른 인종이거나, 왕자이거나 심지어 죄수라고 해서 특별히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거나, 권위를 내세우거나, 다르게 대하지 않는 사회! 분명 부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본 노르웨이 사회의 민주성과 선진성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북유럽 사회의 번영과 평화 이면에 침략의 역사와 제3세계 문제에 대한 외면, 혹은 주변부 국가들의 고통이 있고, 그들의 민주주의는 온 세상에 적용되는 보편적 가치라기보다는 그들 국가 내부에 한정된 개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꿈꾸기 힘든 좌파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고, 국가에서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제공하고, 소수 지방 언론과 공산당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다양한 의견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노르웨이 사회는 분단의 벽에 가로막히고, 국가 보안법의 올가미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잡혀가고, 혼혈아가 트기라고 놀림받으며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동경스러운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북유럽 사회나 한국 사회를 가리지 않고 인류가 지금까지 문명 또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온 폭력에 대해 맹렬히 고발하고 있다. 온건한 민족주의조차도 어떻게 히틀러의 광기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에서, 우리 나라의 현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폭력적 침탈에 시달리고, 분단과 대치, 오랜 군사 독재 통치라는 특수한 상황에 오래 머물러 있다보니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적 가치와 혼합되고, 은근하게 핏줄과 혈통이 인류의 보편성과 다양성보다 더 중요하게 자리잡아왔다. 특히 이런 잠재된 혈통 집단 우선주의는 최근의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이 맹목적인 애국주의와 국가주의의 광풍으로 변형되어 생산적인 토론과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다른 인종,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한 배제와 적개심으로 발전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냥, 군복무, 학교에서의 체벌, 동물원에서 죄없이 무기징역을 살아야 하는 야생 동물들, 포르노 영화속의 강간과 같이 이미 만연한 인류 사회의 폭력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맞서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거부하는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여 양심적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가 이미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집단, 특히 국가의 명령은 종종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비화되어 군복무는 조국의 부름이 되고,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불려져왔다. 우리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향해 힘든 일을 기피하려는 남자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해오고, 우리가 겪었던 폭력에의 추억을 당신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잔인한 논리로 양심과 종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군대에 몰아넣어, 수 천명이 군 내부에서 의문사당하거나 자살하고 있다. 개인의 양심에 따라 군대의 극단적인 폭력만은 거부하겠다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는 감옥에 가거나 군대에 끌려가 폭력과 권위에의 복종을 배우고, 실습하고 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다. 심지어 전 사회가 병참 기지로 바뀌기를 진정 원하는 것인지, 여성까지 군복무를 시켜야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성장하면서 내면에 체득해왔던 폭력과 불평등에 대한 자각, 그리고 혹시 어렸을 때에 간직하고 있었으나 어른이 되면서 까맣게 잊혀져버렸을 우리 마음 속의 평화와 인간 존중의 심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책, 권하고 싶은 책이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