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0일 토요일

고스트 인 러브

고스트 인 러브 책표지

나는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지 못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90년 말에 개봉되어, 엄청난 흥행 실적을 낸 영화인데, 서울에 유학온 나는 대학 시절 '영화관'이란 걸 가보지 못했다. 서울에 와서 초기에 두 가지가 낯설었다. 하나는 지하철이라는 서울에만 있는 교통 수단! 다른 하나는 좌석 예약을 해야 한다는 영화관! 그런 저런 핑계와 그 당시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튼 영화라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래도 라디오에서 하도 많이 나온 음악 언체인드 멜로디는 많이 들어봤던 것 같다.

프랑스의 대중 소설가 마르크 레비의 『고스트 인 러브』를 전자책으로 고르면서, 혹시 비슷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고스트가 되어서야 만나게 되는, 어쩌면 뻔하고 진부한 그런 이야기! 이렇게 짐작을 했지만, 그런 뻔한 사랑 이야기를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영미권이나 미국, 캐나다가 아닌 유럽, 프랑스 작가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기도 했다.

주인공 토마는 피아니스트이다. 작품에서 몇 개의 피아노곡이 나온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너무나 유명한 곡이고, 슈베르트의 즉흥곡도 1번부터 4번까지 모두 언급된다. 빡빡한 연주 스케쥴에 묻혀 사는 피아니스트의 삶의 단편을 조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연주자들이 실은, 밥먹는 시간 빼고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아서 좀 의아했다. 

주인공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죽은 아버지의 유령!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려나? 싶더니, 아버지의 엉뚱한 요구는 아버지가 못 다한 사랑(그것도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을 살아있는 아들에게 이룰 수 있게 부탁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 살고, 빡빡한 연주 스케쥴에 묻힌 피아니스트 아들은 아버지의 엉뚱한 부탁으로 며칠 내로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급박하면서도 리듬감있게 진행된다.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점은 바로 유럽식 대화이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대화, 어머니와 아들과의 대화, 그리고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간의 대화이다. 전에 보았던 일본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대화 방식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장황하지만, 유머가 있고, 외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직설적인 대화!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어서, 원래 원작자가 쓴 말의 뉘앙스를 온전히 느끼지는 못했겠지만, 번역이 매끄러워, 우리말 같으면서도 유럽식 리듬감과 정서가 느껴지는 대화를 엿보는 것이 참 즐거웠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가 사랑했던 그녀를 자식은 어떻게 보게 되는가?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그녀의 가족들은? 이런 미묘한 사람들간의 만남과 관계 맺음, 거기에서 오는 섬세한 감정들에 같이 동화되기도 하고, 안타까움과 환호를 같이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고 나서 마르크 레비에 대해 좀 더 알아보니, 아뿔싸! 작년엔가 읽었던 『그녀, 클로이』도 레비의 작품이었다. 뉴욕 맨하탄의 오래된 고급 아파트와 거기에 사는 다양한 캐릭터들과 주변 풍경이 살아 움직이듯 묘사가 되어 있어서 나는 당연히 미국 작가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2021년 4월 6일 화요일

변두리의 삶과 변두리 로켓

변두리 로켓 책표지

『한자와 나오키』로 유명한 일본 대중 작가 이케이도 준의 『변두리 로켓』을 읽었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고, 원래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받은 피터 홀린스의 『어웨이크』를 읽다가 생각보다 내용이 빈약해서 집어던져 버리고, 재미있는 소설을 찾다가 무심결에 고른 책이었다. 

일본의 한 중소 기업 이야기가 나온다. 규모는 작지만, 그 중소기업의 대표는 예전에 실현하지 못한 로켓 발사라는 원대한 꿈을 가진 연구자 출신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현실은, 대기업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생존의 위협을 극복해야 하는 날마다 새로운 위기의 연속이다. 대규모 부품 구매자였던 대기업이 하루 아침에 구매를 끊어버린다든지, 중소기업이 가진 기술을 탐내고 중소기업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특허 소송을 제기해서 못살게 군다든지, 부품 공급을 받기 위해 과도한 심사 절차를 요구한다든지 하는 깡패같은 "갑"들의 행위들이 실감있게 그려진다.

그런 복잡한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가는 과정에, 회사 구성원과 이해 관계자들과의 갈등도 너무 생생하다. 일본의 회사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는데, 권위주의와 보신주의, 권한 위임이 잘 안 되는 위계적인 의사 결정 과정이 어쩌면 한국의 전형적인 회사들과 그렇게 닮았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사람은 누구나 변두리에 산다.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의 중심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나 개인으로서는 세상의 변두리에 머무르고 있다. 변두리와 중심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스스로 중심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하면, 참 우울해진다. 나도 한 때에는 어떤 분야에서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자부심(?) 또는 자만(?)이 가득차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은 변두리에 내몰렸다고 생각하면서, 충만하던 자신감의 자리는 대인 기피로 채워지고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최소화하고, 로우 프로파일(low profile)을 유지하고 싶은 요즘의 나에게는 어쩌면 코로나19라는 역대급 재앙이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다. 적당히 팬데믹을 핑계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멀리 해도, 그다지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 속의 중소기업인 쓰쿠다 제작소의 대표는, 연구자로서 한 번 실패한 삶에서 변두리 중소기업으로 밀려왔지만, 본인이 품고 있던 꿈과 회사를 이끌어가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버리지 않았다. 나도 꿈을 버린 것은 아닌데... 문제 해결해가는 과정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쓰쿠다 제작소의 큰 기여로 로켓 발사 카운트 다운이 10, 9, 8, 7, ... 들어가는 장면에서 나도 같이 심장이 쿵쾅거렸고, 마침내 로켓이 하늘로 쏘아올려질 때, 현실의 일인 것처럼 눈물이 났다. 그런 눈물을 흘릴 순간과 사건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포기하지는 말자...고 혼자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