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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2

김용옥의 강좌에서 건진 두 가지

별 생각 없이 교육방송을 틀어보았다. 김용옥 선생의 논술 강의가 있었다. 특유의 입담으로 텔레비젼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서 끝날 때까지 보게 되었는데, 두 가지 배운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우리가 외래어를 쓸 때에 한글과 외국 문자를 그냥 섞어서 쓰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Beethoven의 교향곡'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베토벤의 교향곡' 또는 '베토벤(Beethoven)의 교향곡'이라고 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보고서 쓸 때 내가 정말 싫어하는 단어가 '추진(案)'이라고 쓰거나 '감독下에 진행中에 있음.' 과 같이 불필요하게 한자를 한글과 섞어서 표기하는 것이다. 한자어 대신에 우리말 단어를 찾아 쓰자는 것이 아니라 한자어를 표기할 때에 굳이 한글에 한자어를 섞어쓰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대표적인 마크업 언어인 에이치티엠엘(HTML)에도 언어가 바뀌면 반드시 언어를 표시하도록 되어있다. 예를 들면,

<p lang="ko">
<span lang="en">remote control</span>을 줄여서
영어에서는 <span lang="en">remote</span>라고 하지만
리모컨이라고 줄여 쓰는 경우는 없다.</p>

이와 같이 언어 독해의 모드(mode)가 바뀌면 원칙적으로 한 단어이든, 문장이든, 단락이든, 아니면 통째로 파일 전체이든 해당 언어를 표시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스크린 리더(screen reader)나 검색 엔진과 같은 기계가 문서를 정확히 분류하고 해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한국어와 영어는 완전히 문자가 달라서 보통 국내의 스크린 리더에서 알파벳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읽지 못하는 경우는 없지만, 표기 문자가 많이 겹치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섞어 쓰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썼을 때에도 그것이 한국식으로 발음해야 하는지, 일본어식으로 발음해야 하는지, 중국어식으로 발음해야 하는지 컴퓨터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오늘의 결론은 되도록이면 한글로 글을 쓸 때에는 아주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한자나 영어)를 섞어서 쓰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은 보기 싫기도 하고, 한자나 알파벳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글을 읽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어 문화권에서도 글을 쓸 때에 다른 문자 표기를 섞어 쓰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한다. 글쓰기의 아주 중요한 원칙을 배웠다.

또 하나는 되도록 순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순화주의자들의 주장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순 우리말이라는 것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널리 쓰이는 한자어가 있는데 억지로 말이 안 되는 우리말 단어를 만들어 쓰는 것에 대해서도 웃기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예로 든 것이, 먹거리라는 단어였다. 원래 우리 말 어법대로 하면 동사가 명사를 꾸미려면 관형어 형태로 먹을 거리가 되어야 하는데 어법에도 맞지 않게 먹거리라는 단어를 억지로 만들어 이것이 음식이라는 한자어보다 더 좋은 우리말인 것으로 퍼뜨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새로운 우리말 단어를 알게 되면 그 아름다움에 반해 꼭 쓰고싶어지다가도 실제 더 많이 쓰이는 한자어나 외래어가 일상화되어서 사실 생활에서 활용을 못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겠다.



댓글 4개:

  1. 저도 요즘 강의안 만들 때 되도록 한글로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냥 만들다보면 한국어로 만든건지 영어로 만든건지 구분이 안가게 되드라고요. 그런데 XHTML이나 HTML, CSS같은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네요. "에이치티엠엘(HTML)"과 같이 적는 것이 목적하는 바에는 부합하는데 매우 익숙치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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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V' 를 '티비'나 '텔레비젼' 으로 적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HTML 같은 경우는 그냥 적어줘야 하는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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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신현석님, 이으뜸님:

    아직도 저도 어느 게 더 나은지 모르겠어요. 한글로 모든 것을 다 적자니 이미 영어 알파벳이 훨씬 더 익숙한 영어 단어들이 너무 많이 쓰이고 있어서...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글은 읽을 수 있지만 영어 알파벳을 못 읽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죠. 한글로 외래어와 외국어를 먼저 표기하고 꼭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외국어를 표기하도록 되어 있는 한겨레의 편집 원칙을 보았는데, 이 원칙도 100% 지켜지지는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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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photon8/25/2006

    약간 다른 얘기 :



    태그에 '우리말', '국어'는 있는데, '한국어'는 없네. '국사', '국어', '국민' 등 단어가 지금보다 좀 덜 쓰이면 좋지 않을까?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 들어 있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에서 people은 당연히 인민인데, 이를 '국민'으로 옮기는 건 참 우습지. 북한이 그 단어를 '선점'해서 '참 좋은 단어'를 '버리다시피' 했으니... 제헌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가 국민은 국가주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면서 '참 좋은 단어를 북한에 빼앗겨(?) 버렸다'고 했다더군.



    어느 유명 대학에 있는 '국사학과'도 '서양사학과', '동양사학과'와 하나가 되어 '사학과'가 되면 더 보기 좋을 텐데, 그 사람들 '고집' 꺽기가 쉽지 않아서 ...



    참, 고종석씨 책을 좀 읽어 보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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